수상작 소개
| 제목 | 새로운 역사를 꿈꾸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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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고은비(김천예고) | 개최일 | 2015-10-30 | 조회 | 28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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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역사를 꿈꾸며
김천예술고등학교 3학년 2반 고은비
역사의 흐름. 강물이 흘러 바다를 이루듯 역사는 그 줄기의 끝에 가장 큰 바다를 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일제 시기부터 현재까지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백범 김구 선생님의 일생이 아닐까 한다. 한 사람의 일생이 역사에 미친 영향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역사란 흐르는 강물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어야 하지만 우리나라의 역사는 자연스럽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백범 김구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것이 가장 큰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만약에’라는 가정을 하게 되었다. ‘만약 김구 선생님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1949년 6월 26일 그날로 역사를 되돌릴 수 있다면?’ 우리나라의 모습은 현재와 달리 분단국가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역사의 자연스러운 물줄기를 꺾어놓은 ‘김구 선생님 암살’사건이 그런 점에서 뼛속까지 아프게 느껴진다. 해방 직후 우리나라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 세력이 자리 잡은 남한에서 친일 세력이 반공 세력으로 변모해 면죄부를 받고, 친일파를 단죄하려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일제 시대에 일본인과 협조하여 악질적으로 반민족적 행위를 한 자를 조사하기 위하여 제헌국회에서 설치한 특별위원회)는 경찰 세력에 의해 해체되고, 독립을 위해 싸웠던 수많은 사람들은 이른바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하는 비극의 역사가 펼쳐지던 시기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김 구 선생님을 둘러싼 정치적인 암살 계획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국민의 지지를 얻었던 민족지도자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중학교 때 읽었던 백범일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의무감으로 읽었던 것과는 달리 말씀 하나 하나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어렵고 무겁기만 하다고 느꼈던 중학생 시절이 부끄러울 정도로....... 김 구 선생님께서 꿈꾸던 나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김구 선생님의 ‘나의 소원’ 중에서 가장 가슴에 와 닿았던 부분이 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은 원치 아니한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라는 부분이다. 문화의 힘을 높이 샀던 김구 선생님의 생각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던 분이기에 더욱 존경스럽다는 생각을 하였다. 자신의 꿈이 나라를 위한 것은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내가 하고 있는 무용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밤을 보냈다. 그런 밤이 계속될수록 나의 정신은 피폐해져만 갔다. 10여 년 동안 해온 무용을 그만두고 싶을 만큼 현실에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구 선생님은 달랐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 분의 일생을 따라가는 일은 나에게 너무 즐거운 일이었다. 병자년 1876년 강화도 조약이 맺어진 그 해에 김구 선생은 자신의 일생이 기구할 전조였는지 유례가 없는 난산으로 세상 밖에 나오셨다고 한다. 그 후,1894년 우리나라에 마지막으로 실시된 과거에 응시 하셨으나 낙방하셨다. 기구한 운명의 장난인지 우리나라의 초대 대통령이자 김구 암살의 배후인물로 지적되는 이승만도 그 과거장에 있었다고 한다. 이승만은 낙방 후,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갔으나 김구 선생은 철저히 민족주의적인 삶을 사셨다. 과거시험의 낙방은 김구 선생의 인생에 있어서 전환점이 되신 것 같다. 왜냐하면 유교의 사상에서 동학의 사상으로 옮기신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농민군의 접주가 되어 동학농민 운동을 지휘하시다가 결국 일본군에게 쫓겨 만주로 피신하여 김이언의 의병단에 가입하셨다. 그리하여 백범 김구 선생의 나라를 찾기 위한 본격적인 항일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1896년 우리나라로 돌아온 김구 선생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에 분을 참지 못하시고 일본인 첩자를 죽이고 그 피를 마셨다는 유명한 거사를 치르게 된다. 그로 인하여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었고,1898년에 탈옥 하셨다. 탈옥 후에도 독립에 대한 열정은 포기하지 못하시고 신민회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105인 사건으로 인해 다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게 되셨다. 아직 우리나라를 위해 할 일이 남으셨는지 감형으로 출옥하셨다.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하이로 가셔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1928년 한국 독립당을 조직하시고 총제가 되셨다. 이때부터 김구 선생의 열정적인 독립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한일 무력 활동을 시작하시고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셨으며 훙커우 공원에서의 폭탄투척사건 등........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활동을 지휘하셨다. 특히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중국에게 충격을 주어 임시정부의 항일투쟁에 지원을 받았다. 그 기세를 몰아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하셨다.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시고 1945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하는 한편 광복군 낙하산부대를 편성하여 본군상륙훈련을 실시하시다가 8.15광복을 맞게 되셨다. 하지만 백범 김구 선생은 이날 대성통곡을 하셨다. 광복이 기뻐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일궈낸 광복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의 도움으로 얻은 일본의 항복이다 보니 임시정부가 미국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이 김구 선생님을 가장 존경하는 분으로 볼 수 있는 이유이다. 광복 후에는 나라가 갈라서는 것을 막기 위해 남북을 왕래하시며 피 끓는 노력을 하시다가 결국 1949년 6월 26일 12시36분, 경교장에서 육군소위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운명하셨다. 백범 일지를 읽고 나서 문득 얼마전에 가본 ‘상부 보’가 생각이 났다. 4대강 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된 상주 보를 보면서 어른들은 감탄하고 대단하다고 하셨다. 하지만 최악의 늪지로 세계적인 저널에서 소개한 내용은 모두들 간과하고 있었다. 사대강 사업을 통해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았다. 현재 우리나라는 불통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국민을 위한 진정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김구 선생뿐만이 아니라 독립을 위해, 민주주의를 위해 이슬처럼 불꽃처럼 살아간 이름 없는 많은 분들에게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정신을 이어나가게 할 만한 지도자를 보여드릴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눈 덮인 벌판을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역사 앞에서 당당한 김구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나는 밤이다. 오늘의 역사가 부끄럽지 않게 더 발전된 역사의식을 가지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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