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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독서감상문 쓰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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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 소개

수상작 소개 상세내용
제목 백범김구 선생님의 공항 마중을 꿈꾸며..
작성자 배성준(금호고) 개최일 2015-08-17 조회 3094

백범김구 선생님의 공항 마중을 꿈꾸며..  

 

금호고 1학년 4반 배성준

2015년 5월 6일 수요일

오늘 처음으로 그분(김구선생님)을 만났다. 3시간정도 만남이었다.

첫 만남인지라 긴장이 되고 설레이기도 했다. 활짝 웃는 얼굴이 어찌나 멋지신지 나도 덩달아 입꼬리가 올라갔다. 웃는 얼굴만 뵈도 즐거운데 과거를 회상하시며 지난 얘기를 들을 생각을 하니 무척이나 흥분되었다.

김구선생님께서는 인(仁),신(信) 두 아들 얘기부터 시작하셨다.

선생님 나이 쉰셋이건만 인이 신이는 겨우 13살과 17살! 아버지와 아들사이의 따뜻한 대화 한번 못하신 것을 무척하나 서글퍼하셨다. 그래서 두 아들에게 아버지의 지난 일을 알리는 동기에서 유서처럼 쓴 것이 백범일지의 상권이다. 그리고 하권은 윤봉길의사 의거이후 중일전쟁 결과로 우리 독립운동 기지와 기회를 잃어 주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을 염두에 두고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선생님의 경륜과 소회를 고려하여 쓴 것이다.

눈을 지그지 감으시고는 한 폭의 역사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시기 시작하셨다.

어려서 천연두를 앓아서 얼굴에 마마자국이 생긴 일, 아버지 숟가락으로 엿을 바꿔먹고 혼난 일, 어머님이 사 놓은 물감(빨강, 파랑)을 시내에 풀어서 아름다운 색깔에 황홀해 했던 일, 누구나 있을법한 개구쟁이 짓을 하셨던 분이셨다.

어릴 적 집안형편이 어려워서 마음껏 공부할 수 없었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고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을 하시는 도전정신은 꼭 본받고 싶은 것 중에 하나이다.

처음으로 시도해본 과거시험! 하지만 기대와 달리 부정부패로 인한 악폐를 비판하고 비관만 품고 집으로 돌아온다. 첫 시도에 얼마나 실망하셨을지 맘이 아팠다. 하지만 더 심한 비관이 또 기다리고 있었다. 관상의 격에서 김구 선생님 상이 너무도 못생겨 다시 비탄에 빠졌다 하셨다. 나는 선생님께 한 말씀 드렸다. “얼굴에서 ‘얼’은 정신을 의미하고 ‘굴’은 꼴, 즉 모양을 뜻합니다. 결국 얼굴이란 정신의 모습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선생님의 그 웃는 좋은 상은 아마도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이란 정신의 관상이 아닌가 싶다.

 

2015년 5월 9일 토요일

두 번째 만나는 날이다. 날씨가 흐리니 쌀쌀해서 김구 선생님께 차를 대접하고 싶었다. 아직 고등학생인 나는 커피를 마시면 안 되지만 몰려오는 잠을 몰아내기 위해 가끔 마신다. 선생님께서는 커피를 좋아하시지는 않을 것 갔지만 요즘 젊은이들이 즐겨 마시는 커피를 맛보여 드리고 싶어서 ‘아메리카노’로 2잔 준비했다. 향은 좋은데 맛이 여간 쓴 모양인지 미간을 찌뿌리시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이 부분은 내상상이다. 김구선생님이 마치 맞은편에 앉아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착각을 한다. 이 책이 위인전이기 보다 자서전식으로 이야기 하듯 써 진 책이라서 그런 것 같다.)

김구선생님의 애국심과 많은 업적이 있기까지 선생님을 가르치신 훌륭한 스승님이 한 분 계신다. 오늘은 그 스승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김구선생님이 19세가 되던 해에 빈부귀천에 차별대우가 없는 동학의 매력에 끌려 입도되어 새 나라 새 국민을 꿈꾸지만 내부의 불화로 패퇴하고 말았다. 백범이 동학운동에 직접 참여했다는 사실은 민족주의를 올바로 이해하게 만든 계기라 생각이 든다. 백범의 체질적인 민족의식은 동학 교리를 통해 이론화되었고, 동학운동에 참여를 통해 실천운동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때가 패장 신세로 진사 안태훈(안중근의 부친)의 집에서 지내던 중, 막막한 미래를 생각하며 어느 쪽으로 진로를 잡아야할 지 답답하고 우울한 상황에 ‘고능선 스승’을 만난다. 큰 뜻을 품은 사람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열성적으로 가르치셨다. 김구선생님은 이렇게 회상하셨다. “나의 마음씀과 행동이 아름다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청계동 고스승님이 나를 특별히 사랑하여 심혈을 기울여 가르친 덕분인것 같다. 이 세상에서 나를 그처럼 사랑하시던 그분의 얼굴을 뵐 수 없고, 참되고 거룩한 사랑을 다시 받지 못하니 아! 참으로 슬프구나!”라고 회상하셨다. 슬픔이라는 단어를 저분의 입에서 들으니 진짜 슬픔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고스승님의 가르침 중에 ‘사람이 재주와 능력이 있더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그 재능이 도리어 화가 된다. 사람의 처세는 반드시 의리에 기본을 두어야하며 일을 해나감에 있어 판단과 실행, 계속의 세단계로 사업을 성취해야한다고 하셨다. 이때부터 김구선생님은 동지의 의리, 민족의 의리, 국가의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스승님의 가르침의 의리가 애국심으로 뿌리를 내린 것 같다.

 

2015년 월 17일 일요일

지난주 선생님을 뵌 뒤로 감동 때문일까? 나도 이미 애국자가 된 듯 어깨가 으쓱해졌다.

오늘은 김구선생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치하포의거’에 대한 이야기이다.

을미사변 직후, 명성황후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인을 죽이고 인천 감옥으로 이송된다. 세 차례의 힘든 심문을 받는 백범의 모습에서 청년 백범의 끓어오르는 혈기와 애국심이 절로 느껴졌다. 재판도중에 왜놈들을 말 한마디로 눌러버리고 몰려드는 사람들을 향하여 한바탕 연설을 하실 때는 나도 모르게 박수가 나왔다. 김구선생님은 옥중에서도 많은 일들을 하셨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글을 깨우치게 하고, 애국심을 심어주고, 억울한 사람들의 사연을 듣고 소장을 써주어 승소하는 일이 많았으니, 옥중생활도 얼마나 바빴으랴 짐작이 간다. 그 당시 신문에 인천감옥은 감옥이 아니라 김구선생님의 학교라는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이 구명운동을 벌였지만 안타깝게도 무산되지만 하늘도 감동하셨는지, 다행히 고종 황제가 사형을 정지하라는 친직을 내려주시어 옥에서 무사히 탈출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때부터 도피생활이 시작되면서 삼남지방을 유람하게 된다.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유람하시며 보고 듣고 느낀 바가 크셨다. 주변 환경에 휩쓸려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지 못하고, 일제의 선동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민중을 보고 지식 전달을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워야겠다고 다짐하셨다.

 

2015년 5월 24일 일요일

지금까지는 김창수(김구선생님의 젊은시절 이름) 이야기를 들려주셨다면 오늘부터는 김구의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옥고를 치르는 동안에 이름 김구(金龜)를 김구(金九)로 바꾸고 호는 연하(蓮下)를 백범(白凡)으로 바꾸셨다. 그분의 이름과 호에서는 백범의 겸손함을 느낄수 있었다. 이름을 바꾼 것은 일제의 호적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이고, 호를 바꾼 것은 우리나라의 하등사회, 곧 백정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지금의 나정도 되고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뜻에서였다. 나라의 독립의 선두는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이 함께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시작된 애국계몽 운동과 신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김홍량,최재원의 몇몇 청년들과 함계 교육발전에 정성을 다 하셨다. 그리하여 읍내 예수교회에 1차 안식학교를 설립하고, 다음으로 사립양산학교가 설입되었으며,그 다음으로 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뜻이 있는 길에 길이 있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다. 인재를 양성하여 장차 완전한 국가의 일원이 되도록하여 약한 내 나라를 강하게 하고, 어둠으로부터 광명을 되찾는 것이라고 하며, 지식이 부족하고 애국심이 결여된 당시 국민들에게 상기시켰다. 하지만 어디서나 왜놈들의 방해와 지방 양반들을 일깨우기는 쉬운일은 아니었다. 더 많이 배웠다는 양반들이 아직도 허세를 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내가 한마디 해주고 싶었다. “해주서촌 양반들이여! 충신의 자손이니 공신의 자손이니 하며 일반 백성을 마소 보듯하고 노예시하던 그대들의 기염은 오늘날에는 어디 갔는가 ” 이렇게 김구 선생님의 흉내를 내어 양반을 호통치고 나니 속이 좀 후련해졌다. 자주 선생님을 만나니 나도 조금 선생님을 닮아가고 있는것 같아서 오늘은 참 뿌듯했다.

 

2015년 6월 6일 토요일

요즘 내가 바빠서 김구선생님을 만나지 못한지 2주가 넘은것 같다. 바쁜학교생활과 시험 ,학원 공부에 지쳐서 현재 우리나라 입시문제를 김구선생님께 하소연이라도 해 보고 싶어서 다시 책장을 열었다.

그 날은 김구선생님께서도 무척 바쁘셨다. 전체 도내의 교육기관설립, 유지하는 책임을 지시고, 해서교육총회를 조직하고 학무총감으로 무척이나 바쁜일정이셨다.

나라는 세가 나날이 기울고 국가가 합병의 치욕을 당하니 선생님께서는 더욱 구국활동에 매진하셨다. 그러던 중 안명근 사건에 연관되어 (왜놈이 우리나라를 강점한후 처음로 국내의 애국자를 망라하여 체포함) 다시 15년형을 선고 받고 모진 고문을 받는다. 고문이 얼마나 혹독한지 듣고만 있어도 내가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감옥의 수인이 2,000명정도인데 대부분이 의병과 애국자, 교육자였으니 .....

나라 잃은 슬픔과 고통이 얼마나 켰으랴!

 

2015년 6월 8일 월요일 저녁에

그분께서 가출옥으로 석방되셨다고 하셔서 늦었지만 뵈러 갔다. 흰 도포를 입고 둥근안경을 끼고 계신 선생님의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오늘은 무거운 이야기가 아닌 동산평에서 농감생활 이야기를 해주셨다. 아니 나라가 이모양인데 어서 빨리 독립운동 계획은 하실 생각은 안하시고 농사감독을 하시다니 ... 선생님께서도 이제 지치셨나 내심 걱정이 되었다. 하필이면 풍토가 나쁘고, 소작인들의 인품이 극히 험하기로 소문난 곳으로 가신다하여 더욱 놀랬다. 하지만 잠시후 선생님께서 왜 이곳으로 농감을 청하셨는지 알것 같았다.

도착하시자 마자 ‘소작인 준수규칙’을 공포하였다.

-작인으로 도박을 하는자 소작권을 주지않을 것임

-학령아동이 있는 자로서 학교에 입학시키는 자는 가장 좋은 땅 두마지기를 더 줌

-농업에 근실한 성적이 있는자는 조사하여 추수때 곡물로 상을 수여함

단 몇 개월사이에 이동네가 어떻게 변했는지는 말 하지 않아도 알겠지 않는가! 동네에는 소학교가 세워지고,자녀의 교육과 곡식 보따리가 자기집으로 옮겨 쌓여지니 농가 부인들은 더욱 감동했지 않겠는가! 나무만을 보지 않고 숲을 볼줄 아시는 김구선생님의 역린과 섬김의 리더쉽에 나는 또 감동을 받고 돌아왔다.

 

2015년 6월 14일 일요일

이번 이야기는 김구 선생님의 제2의 전성기라 생각이 든다. 선생님께서는 황해도를 대표해서 임시의정원으로 피선되어 중국 상해로 가신다. 임시정부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던 도산 안창호를 찾아가 임시정부청사의 ‘문파수’을 자청했다가, 초대 경무국장에 취임하셨다. 그후,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이봉창의사, 윤봉길의사로 하여금 폭탄을 던지게하였다. 이들의 의거 덕분에 장개석의 지원을 받게 되어, 독립 전쟁을 위한 군사력 확보에 집중하던 김구선생님은 1940년에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선출되신다. 미국 OSS와 합작하여 국내침투를 위해 광복군 특공대를 편성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하던중 일본의 항복소식이 들려온다. 일본의 패망으로 인해 이작전은 무산이 되었을때 선생님께서는 얼마나 낙담이 크셨는지 모른다..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나는 이소식을 들었을때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일본의 항복을 우리 손으로 직접 이뤄내는 것이 아니니 앞으로 국가건설에 있어서 임시정부의 권한은 약화되고 또 다시 외세의 간섭을 받게 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이때 광복군이 일본을 격퇴했더라면 우리는 분단국이 아니라 통일국으로 강대국의 대열에 오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2015년 6월 21일 일요일

오늘은 선생님과의 마지막 만남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소원’이라는 마지막 7장을 큰소리로 선생님께 읽어 드렸다. 감사의 마음을 듬뿍 담고, 애국심을 가득 담아 내 작은 가슴에서 우렁찬 소리로 또박 또박 읽어 내려갔다. 백범선생님의 인생 전체를 축약시킨 이 7장의 내용은 엄청난 감동으로 복받쳐 눈물반, 콧물반으로 얼룩져 버렸다. 그 중에서 가장 선생님께서 원하시는 부문을 다시 읽어 본다.

“나는 우리나라가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약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가장 김구 선생님다운 높은 도덕성을 가진 민주적 지도자로서의 말씀이셨다.

민족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며 높은 문명의 수준을 누리는 문화적 대국을 건설하는 것이 김구 선생님의 원대한 이상이셨다.

 

2015년 6월 25일 목요일

선생님! 27년만에 조국을 방문하시니, 감회가 새로우시지요 ! 공항으로 마중 나가겠습니다. 배성준 올림

나는 이작은 메모지를 마지막 책장에 꽂았다.(나는 이책을 읽는 내내 항상 선생님이 맞은편에 계셨고, 앞으로도 어디서나 나와 동행을 해 주시기로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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