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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독서감상문 쓰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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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 소개

수상작 소개 상세내용
제목 불멸의 유성, 백범김구
작성자 장진혁(충주대원고) 개최일 2015-04-28 조회 2892

불멸의 유성, 백범김구

 

 

충주 대원고등학교  2학년 1반 장 진 혁

 

 깜깜한 밤하늘에서 길을 잃은 미아처럼 헤매다 민족을 위해 목숨을 담보로 기꺼이 내어놓고 고난의 선구자가 되어 평생을 바치신 백범 김구 선생!

 

 그 분의 열정과 강직함과 민족을 향한 굳은 의지가 담긴 백범일지는 일지라는 것 때문에 일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염두에 두고 나라 일을 하는 아버지로 서 두 아들에게 유서로 남기고자 한 김구 선생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보려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한 구절처럼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를 기록하면서 솔직 담백하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그 뜻을 배우려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27년간 임시정부의 요직을 지내시며 직접 친필로 기록하셨고 내용면에 있어서도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사를 연구하기 위한 중요한 역사 자료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여 1997년 <백범일지>는 보물 제 1245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그 원본은 지금 서울 용산에 위치한 백범 김구 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는데 기회가 된다면 언제 꼭 한 번 가서 김구 선생의 숨결과 얼이 담겨진 친필로 쓰여진 백범일지를 보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뭔지 모를 뭉클함이 코끝을 찌른다. 김구 선생의 강직하고 위대한 민족사랑은 그 분의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고스란히 묻어 있어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김구 선생은 18세가 되던 해에 ‘아기접주’라는 별명을 들으며 동학농민운동에 발을 들여 놓았다. 어쩌면 그것이 선생을 민족의 영원한 등불이 되게 하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백범일지에는 한국의 역사책처럼 많은 의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총으로 사살하고 현장에서 체포된 안중근의사, 일왕 히로히토 살해를 아쉽게 실패하고 순국한 이봉창의사, 일본의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지고 25세의 꽃다운 나이에 순국한 윤봉길의사를 비롯한 그 외의 수많은 독립운동 열사들은 김구 선생과 함께 민족을 위해 끝까지 비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당당했음을 알 수 있었다.

 조선인으로 변장한 일본인을 살해하여 치하포의거로 유명해진 선생은 여러 번 옥중에 갇히게 되지만 동지들의 사기와 정신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나의 생명은 빼앗겨도 나의 정신은 빼앗지 못하리라’고 큰 소리로 외치기도 했다. 옥중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절대 굽히지 않았던 김구 선생의 정신을 어찌 존경하고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때문에 오랜 시간이 지나고 있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 우리 민족이 사라지지 않는 한 백범 김구의 ‘백범일지’는 두고두고 민족의 훌륭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어느 언론매체의 인터뷰에서 ‘한 명의 김구 선생을 잃었다’라고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 했었다고 한다. 또한 2007년 ‘남북관계 발전 및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을 이끌어낸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보더라도 백범 김구 선생이 우리 민족과 함께 한 근현대사에 남긴 발자취는 모진 비바람이 몰아치고 세월이 강물처럼 흐르고 또 흘러도 지워지지 않고 더욱 선명하게 남아 민족을 지킬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중심적으로 변해가는 후손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워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구 선생은 탈옥을 한 뒤에 일본의 눈을 피해 전국을 떠돌다가 승려가 되기도 했었지만 민족에게 등을 돌리지 못하고 다시 환속하게 된다. 그리고 ‘나라 살리는 길은 오직 교육뿐이다’라고 주장하며 교육자로서 활동하면서 나라를 되찾기 위한 비밀결사체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이재명 의사등과 함께 하지만 또다시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지만 확고한 신념과 굳은 의지로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내는 선생을 악랄한 일본도 꺽진 못했다. 그러나 감옥에서 복역하던 선생은 마음을 바꾸어 열심히 하는 척하여 가출옥으로 방면되는 기회를 얻어낸다. 그 후 망명의 길을 선택하여 중국 상해로 가서 오직 대한독립이라는 한 뜻 한마음으로 뭉친 그 곳의 동포들과 임시정부를 만들게 된다. 내무총장으로는 도산 안창호가 맡고 이승만을 총리로 임명하지만 그는 미국에서 오지 않았다. 그렇게 총리가 자리를 지켜주지 않자 그 밑에 차장들이 대리로 국무회의를 진행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선생은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원했지만 안창호 선생은 그를 경무국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임시정부에서 독립의 뜻을 품고 활발한 활동을 이어 나가게 되었으나 아까운 독립의사들의 목숨이 희생되어지는 것은 어찌 할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 되었다. 그렇지만 오직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그들의 의지까지는 꺽진 못했다.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의 내용처럼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다’라는 마지막 구절은 우리 민족의 가슴시린 마음을 그대로 담은듯하여 답답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렇듯 여러 각지에서 민족의 독립과 빼앗긴 땅을 되찾겠다는 굳은 의지는 그 어떤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굽힐 줄 몰랐고 잇따르는 불굴의 의거에 일본은 급기야 ‘백범을 특별히 주의하라’는 명령을 내리기 까지 했다. 그렇게 길고 긴 이국땅에서의 독립운동을 끝내고 되찾은 내나라 내 땅을 밟게 된 선생은 소원을 이루었다. 독립국만 되면 그 나라에서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깊은 뜻을 품고 있었기에 첫째도 둘째도 세 번째도 오로지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 이오' 라고 대답할 것이라는 선생은 70평생을 그렇게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

 

 그러나 1949년 6월26일 육군 소위였던 안두희의 암살로 민족의 큰 별은 떨어지고 말았다. 하늘과 땅은 물론이고 대한의 사람들의 슬퍼하는 눈물 배웅을 받으며 역사의 뒤안길로 가셨다. 그리고 생전에 귀국한 이듬해 일본에 있던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모셔 와서 현재 애국선열 묘역인 사적 제 330호로 지정된 효창공원에 안장하셨고 자신도 그 곳에 함께 묻히기를 원하셨다는 뜻을 받들어 모셨다고 한다. 중국에서 아직 찾지 못한 안중근 의사의 유해도 함께 이곳에 모셔지기를 바라며 진심으로 머리 숙여 그 분들의 뜻을 가슴에 담는다.

 

 백범일지는 김구선생의 자서전으로써 나라 잃은 민족에게 가야 할 길을 제시해주고 이 책의 주인은 결국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우리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민족에 대한 자긍심과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하면서 이 땅에 태어나서 이 나라 이 민족의 한 사람으로 백범이라는 큰 별을 동경하고 존경하며 자랑스러움을 가지고 미래를 꿈꾸며 살아 갈 수 있음에 존경하는 마음과 함께 소중하고 귀한 시간이 되어 감사했다.

 

 김구 선생은 비록 곁에 계시지 않지만 <백범일지>로 하여금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것이며 불멸의 유성처럼 어두운 밤에도 길을 알려 주실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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