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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독서감상문 쓰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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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 소개

수상작 소개 상세내용
제목 자라나는 새싹들의 영원한 이정표
작성자 김건우(진흥고) 개최일 2011-11-17 조회 2426

<백범상> 2학년 1반 김건우

 

자라나는 새싹들의 영원한 이정표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발걸음을 하나라도 어지럽히지 말라.

 

오늘 내가 가는 이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므로…….

 

이 구절은 백범 김구 선생이 애송하던 시이다. 민족지도자로서의 역할과 그 책임감이 잘 느껴지는 명시로 남을 이끄는 리더십이 주목받는 현대의 우리들에게도 그 의의가 크게 느껴진다.

나는 백범을 ‘자라나는 새싹들의 영원한 이정표’라고 칭하였다. 그의 기개, 효심, 애국심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백범에게 배울 점이 많다. 지금 우리는 ‘자라나는 새싹’이므로 유혹이라는 파도에 휩쓸리기 쉽고, 나태라는 벌레에 뿌리를 갉아 먹히기 쉽다. 그러하매, 우리는 마땅히 백범이라는 이정표를 보고 우리 앞에 펼쳐진 눈 덮인 들판의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함이 옳으리라.

백범 김구 선생은 1876년 7월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하셨다. 태어나실 때 인즉,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께서는 태몽으로 “푸른 밤송이에서 붉은 밤 한 개를 얻어 깊이 감추어둔 것”이라 말씀하셨다. 나는 감히 푸른 밤송이와 붉은 밤을 태극무늬, 즉 조국이라고 보며 이를 얻어 깊이 감추어둠은 그 누구에게도 조국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백범의 신념을 상징함이라고 해몽해 보았다. 내 마음대로의 해석이지만 한 평생 조국을 위해 살아오신 선생을 표현함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훗날 경무국장, 주석 등 임시 정부의 주요 직책을 두루 거친 백범이지만, 그의 어린 시절이 순탄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청소년기의 많은 시간을 집안일과 나무에 보내야만 했던 백범께선 또래 양반 자제들이 서당에서 글 외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말할 수 없는 비애를 느끼셨다고 한다.

이같이 남다른 학열을 가지셨던 백범께서는 아버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과거 급제의 꿈을 키우셨다. 그러나 비리로 가득찬 과거 시험장을 보시고는 “선비가 되는 유일한 통로인 과거장의 꼬락서니가 이 모양이니, 도대체 과거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시며 스스로 과거 공부를 포기하셨다. 당대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불굴의 신념으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가시는 선생의 모습을 보니, 지금 나의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졌던 대목이었다.

소싯적 백범은 굉장히 호기심이 많은 소년이었을 것 같다. 실제로 선생께서는 과거 공부를 그만 두신 후 마의상서를 들여다보시며 관상학에 몰두하시기도 하셨다. 이뿐이랴? 동학에 입도하여 접주로서 활동을 하시기도 했다. 이처럼 다양한 방면에 관심을 가지셨던 백범이지만 결국 처음부터 그의 갈 길은 아니었나보다. 호기심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생각을 속에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에 그치지 않고 몸소 행동을 통한 백범의 실천력은 요즘 청소년들에게 반드시 귀감이 되는 덕목이리라.

백범을 이야기하면서 백범의 첫 스승인 고능선 선생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옛 명나라의 유학만을 강조하시며 신지식에 부정적인 고지식한 면을 가지고 계셨으나 그의 의리관과 사생관은 백범의 모든 해동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아! 청출어람이라 했던가, 청년 김구와 70대 스승 고능선 선생의 진심어린 마음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대화는 보는 나로 하여금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평소 김구라는 위인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내가 읽은 백범일지의 표지를 보았을 때 역시 왠지 모르게 주름투성이의 완강하고 고지식해 보이는 모습이 전혀 호감이 가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백범을 존경하게 된 하나의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치하포 사건을 말할 수 있겠다. 평소 가슴속으로 왜놈에 대한 의분을 감추고 있던 청년 백범은 치하포에 이르러 왜놈의 칼에 굴하지 않고 용기로써 맞서니 백범의 대담함에 한동안 멍해 있었던 나를 기억한다. 이 사건으로 백범은 인천 감리서에 투옥되어 재판을 받게 되지만, 오히려 법정에서 일본인 감리사 와타나베에게 호통을 치는 백범의 기개는 천둥에서라도 비교할 수 없으리라.

살신성인. 그야말로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를 이르는 말이라 생각된다. 어머니의 지극한 후원이 없었더라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백범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백범이 해주와 인천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 여사께서는 매일같이 격려와 위로를 아끼지 않으신 든든한 버팀목으로 서 계셨다. 이뿐인가? 백범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존재는 정신적 지주였다. 그가 하는 잘못된 행동에 질책으로 바로 잡으시고, 기생과 어울릴 때면 50대의 백범을 회초리로 가르치셨다. 한평생 아들을 위해 살아가셨던 곽낙원 여사를 보며 어머니의 사랑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임시 정부가 수립된 직후, 백범은 안창호 선생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독립 정부가 수립되거든 정부의 뜰을 쓸고 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되고 싶소.”라고. 아! 민족의 지도자께서는 스스로를 낮추어 보잘 것 없는 문지기가 되심에도 끝끝내 독립 정부를 지키고 싶어 하시는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신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이 너무나도 감명 깊어 몇 번이고 다시 읽어 가슴 속에 새겨보았다.

비록 성공하진 못했으나, 나는 이봉창 의사의 용기 있는 의거를 기억한다. 사실 이봉창 의사는 일본식 복장과 능숙한 일본어 구사로 임시 정부 인사들에게 많은 불신을 받았다. 그런 그를 다독이고 끝까지 믿어준 이가 있었으니 바로 김구 선생이셨다. 대인배같은 마음 씀씀이와 ‘믿음’ 이라는 리더십의 자질을 보여주심에 어쩌면 시도조차 못 했을 뻔 한 이봉창 의거의 숨은 공로는 백범의 리더십에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오.”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우리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 “우리나라의 완전한 대한 독립이오.”대답할 것이다.

그렇다. 선생의 평생 소원은 첫째도 독립, 둘째도 자주 독립, 셋째도 완전한 자주 독립뿐이었으니 평생을 구국에 헌신한 삶을 사신 것이다.

당신께선 완전한 자주 독립국이 되려면 백정, 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하겠다는 바람을 담아 호를 백범이라 지으셨다. 이는 독립 운동의 선구자이시며 진정한 민족 지도자의 자세인 것이다. 그리고 현재, 우리 ‘새싹’들은 오늘도 하얗게 눈으로 덮인 들판 속에 찍혀진 백범의 발자취를, 그의 영원한 이정표를 따라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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