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작 소개
| 제목 | 백범일지를 읽고 | ||||
|---|---|---|---|---|---|
| 작성자 | 추유은(목포여고) | 개최일 | 2011-11-14 | 조회 | 2500 |
|
백범일지를 읽고
목포여고 추유은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은 힘든 수난과 고통의 시간을 견뎌왔다. 특히 일제 치하의 36년은 우리 민족에게 잊지 못할 한을 안겨주었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다. 백범 김구는 일제 강점기의 힘들었던 시기에 우리 민족을 이끌었던 민족 지도자 중 한 명이다. 백범일지는 김구가 어린 두 아들들에게 남긴 자신의 자서전이다. 유서 대신으로 쓴 이 책은 해방 후에 출판되었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나 역시 전에 백범일지를 읽으려 시도해 보았지만 생각보다 난해한 내용에 책을 덮었고 이제야 쉽게 읽는 백범일지로 그의 삶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백범 김구는 하층민인 백정과 평민인 범부를 의미하는 백범이라는 그의 호처럼 영웅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평범한 사람에 가까웠다. 아버지의 멀쩡한 숟가락을 부러뜨려 엿을 사먹거나 냇가에 색이 다른 물감을 풀어 넣는 등 개구쟁이였던 그의 어린시절에는 절로 웃음이 났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일제에 의해 강탈당했던 험난한 시절을 겪으며 김구는 수많은 좌절과 실패의 고배를 맛봤어야만 했다. 어릴 때부터 강씨나 이씨 등 주변 양반들의 멸시에 울분을 터뜨렸던 김구는 과거에 응시하나 낙방하고, 매관매직이 성행하던 당시 과거에 비관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그 후 김구는 동학군에 참여하나 실패하고 설상가상으로 의병마저도 실패하고 만다. 어떤 사람들은 단 한번의 실패에도 쉽게 좌절하고 포기한다. 한 번도 아닌 여러 번의 좌절을 겪은 김구가 다시 일어서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스승인 고능선 선생의 ‘가지를 잡고 나무에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마저 놓는다면 가히 대장부’라는 교훈에 다시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국모를 시해한 일본인을 치하포에서 처벌한다. 이 사건으로 김구는 감옥에 갇히고 사형될 위기에 처하나 고종의 명으로 사형에서 벗어나고 후에 탈옥한다. 을미사변은 우리 민족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이다. 일제에 의해 국권이 유린당한 것도 모자라 국모가 피살되었다는 것은 결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김구의 치하포 사건이 통쾌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젊은 날의 김구가 조금 성급했던 건 아니었는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범일지 내에서 김구가 그 일본인을 국모를 시해한 미우라라고 판단한 근거는 그 일본인이 칼을 차고 있었다는 것 하나였다. 그런 불확실한 근거로 일본인을 죽이고, 여관 주인을 꾸짖어 일곱 그릇의 밥을 가져오게 하여 사람들 앞에서 영웅적 면모를 과시했던 김구의 모습이 내게는 조금 낯설었다. 그랬던 김구는 세 번째 투옥 후 새로운 교훈을 얻는다. 안악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된 그는 모진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항일 의지를 굳게 다진다. 또한 김구는 감옥에서 도적 김진사를 만나 그와의 대화로 조직의 체계성과 훈련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이전까지의 김구가 조금 성급하고 혈기에 치우쳤던 것에 반해 감옥에서의 시련을 겪은 후 김구는 더 침착하고 신중한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로 당시 일본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전향했던 독립 운동가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오히려 일제에 대한 항일의지를 불태우고 민족의 앞날을 생각한 김구가 존경스러웠다. 가출옥 후 김구는 상하이로 망명하여 뜻이 있던 청년들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운다. 각 부서를 조직하고 독립 자금을 원활하게 유통할 수 있도록 연통제와 교통국을 만드는 등 이전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조직을 구성하는 김구가 놀라웠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연통제와 교통국이 파괴된 후 임시정부의 운영은 어려워졌다. 설상가상으로 임시정부 내의 사상과 독립 방법론의 차이를 해소하기 위해 열린 국민대표회의까지 깨지게 된다. 그 결과 임시정부는 내각조차 구성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 놓이고 만다. 당시 세계정세가 복잡해지면서 독립운동계에도 공산주의와 민족주의의 사상 대립이 생겼다. 민족 구성원 모두가 일치단결하여 독립에 힘써야 할 때 사상의 차이로 분열한 것이 정말 안타까웠다. 광복 후에 남북이 분단되었을 때도 사상의 차이를 떠나 힘을 모았다면 통일을 이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더 아쉬웠다. 침체기의 임시정부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한인 애국단의 활동이었다.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임시정부는 어느 정도 활력을 되찾았고 중국 국민당 정부와 미주 동포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국민당 정부의 지원은 임시정부가 후에 한국광복군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지금도 훙커우 공원에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 기념비가 있다고 한다. 한때는 수천 명이었던 독립 운동가들이 이제는 겨우 수십 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탄하던 김구의 말처럼 그토록 어려웠던 시기에 이들의 의거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다. 의거 이후 무고한 이들이 피해입지 않도록 위험을 무릅쓰고 주모자가 자신임을 밝힌 김구의 모습은 내게 큰 감명을 주었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까지 자신보다 민족을 먼저 생각했던 김구를 보며 지금 나의 편안한 생활은 모두 그들의 희생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숙연해졌다. 본격적인 대일전쟁에 대비하여 김구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미국 OSS군과 공동작전을 세운다. 그러나 김구의 국내 진공 작전은 일본의 패망으로 무산되고 만다. 이날 김구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라며 굉장히 낙담한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힘이 아닌 연합국의 승리로 얻어진 광복은 우리가 우리 손으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는데 큰 걸림돌이 되었다. 만약 국내 진공 작전이 성공하여 광복을 우리 손으로 이룰 수 있었다면 역사는 지금과는 현저히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나의 소원’에서 김구가 간절히 원했던 것은 완전한 자주 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구의 그 염원은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에 의해 좌절되고 만다. 그 후 김구는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 국가를 수립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결국 안두희의 총에 맞아 남북통일의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백범이 한말 중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말지어다. 오늘 내가 디딘 발지국은 언젠가 뒷사람의 길이 되니라.’라는 말이 있다. 그는 조국의 위기에 자신의 안위나 이해관계보다는 후손들에게 남겨줄 온전한 조국과 역사를 중시하였다. 아직 그가 그토록 바라던 완전한 통일 국가는 수립되지 못 하였다. 이제는 우리가 그의, 아니 우리를 위해 희생한 그분들의 뜻을 이어받아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 완전한 자주 독립의 나라를 세워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
|||||


> 알림 > 백범일지 독서감상문 쓰기대회
백범일지 독서감상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