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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영상실록 '영웅'] 죽음에서 걸어 나온 '임시정부 수호신'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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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6-08-18 조회 137
입력 : 2016.08.18 08:12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통일운동가, 정치인이다. 일제의 탄압에 맞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상하이(上海·상해)로 망명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그는 비밀결사인 한인애국단을 조직, 윤봉길 의거와 이봉창 의거를 지휘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미·소공동위원회 반대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48년 1월부터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의 통일조국 건설의 열망은 좌·우 이념대결과 국제정세의 흐름에 밀려 결실을 맺지 못하고, 1949년 집무실인 경교장에서 안두희가 쏜 총탄을 맞고 운명했다.


김구,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첫째 총탄에 김구, 둘째 총탄에 현익철, 셋째 총탄에 유동열, 넷째 총탄에 지청천이 맞았다. 현익철은 현장에서 즉사하고 김구와 유동열은 중상을, 지청천은 경상을 입었다.' 1938년 5월 7일 중국 후난성(湖南省·호남성) 창사(長沙·장사)의 난무팅(楠木廳·남목청)이라는 건물에서 저격사건이 벌어졌다. 지청천이 이끄는 조선혁명당의 본부이자 임정 요인과 그 가족들의 거주지로 사용되던 이 건물에서 한국독립당과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등 3당 대표가 통합문제를 논의한 뒤 만찬을 할 때였다. 난데없이 조선혁명당 간부 출신인 이운한이 들이닥쳐 권총을 발사한 것이다.

중상을 입은 김구와 유동열은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다. 백범 김구는 의식불명에 빠졌다가 기적처럼 일어났다. 둘째아들 김신은 "가슴에 총탄이 박힌 아버지는 의식불명으로 한 달간 입원하셔야 했다. 처음 병원에 실려 가셨을 당시 의사는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판단하고 아버지를 그냥 응급실에 방치해 두었다. 그런데 수일(4시간 설이 있음)이 지나도 아버지는 숨을 쉬고 계셨고 이를 확인한 의사는 그제야 치료를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장제스(蔣介石·장개석) 중국국민당 총통은 "측근인 후난성 성장 장츠중(張治中·장치중)에게 '모든 힘을 다해 김구를 살려내라'고 명령했다"라고 회고록에 적었다. 당시 장제스는 하루에 여러 차례 전문을 보내 백범의 병세를 물었다고 한다.

당시 백범의 몸속에서 제거하지 못한 총탄은 백범이 안두희의 저격으로 서거할 때까지 몸 속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백범은 27년 동안 임정을 지키며 무수한 위기를 넘겼다. 백범은 생명의 위기를 넘길 때마다 어머니 곽낙원 여사에게 "전 죽지 않습니다. 서울에 가서 통일된 자주독립국을 보기 전까지는 눈을 감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白凡의 아들로, 조국 하늘 지키다
 
백범은 목숨을 걸고 임정을 수호하는 무서운 결기를 보여주었다. 상해 임정 초기 경무국장 백범은 수하 20여 명의 단원을 이끌고 일제 밀정이나 친일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다. 백범의 비서실장을 지낸 민필호 선생은 "김구 선생은 한인 밀정이 오면 비밀리에 체포해 상해시 변두리에 세 얻은 집으로 끌고 가서 처리해 버렸고 그 수가 30여 명에 달한다"라고 기록하였다. 당시 현장을 목격했다는 항일운동가 이화림의 회고에 따르면, 백범은 프랑스 조계 안에 있는 이화림의 거처에 일제 밀정을 유인해 와서는 직접 목을 졸라 '처단'하였다.

"김구 선생은 그에게 물 한 잔을 따라 주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물을 마실 때 김구 선생은 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해 둔 끈을 꺼내 재빨리 그의 목을 묶었다… 머리를 돌려보니 눈은 이미 풀려 있었고 숨이 이미 끊겼다…." 이화림은 후에 김원봉이 결성한 조선의용대에 가입해 항일투쟁을 했으며 광복 후 중국에 남아 있다가 6·25전쟁 때 북한인민군 6군단 위생소장으로 참전한 인물이다.

백범은 "범죄자의 처벌은 설유방송(說諭放送·훈방) 아니면 사형이었다"라고 할 정도로 강경하였다. 백범의 비서 격이었던 엄항섭이 백범의 구술을 받아 펴낸 '도왜실기(屠倭實記)'엔 "왜적이 파견한 밀정 가운데 왔다가 다시 돌아가지 못한 놈들의 수효가 셀 수 없이 많았다"라고 적혀 있다.

백범의 최대 업적에 대해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장제스을 설득해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백범은 카이로회담을 앞둔 1943년 7월 26일, 장제스를 찾아가 일본 패망 후 한국을 반드시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동의한 장제스는 그해 11월 카이로회담에서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 처칠 수상을 설득해 한국을 독립시킨다는데 합의했다. "적절한 과정을 거쳐서(in due course)"라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가 될 것임을 결의한다"라는 내용을 선언문에 넣은 것이다. 여기엔 물론 백범과 장제스의 친분이 작용했다.

윤봉길 의거 이후, 장제스와 회담하는 김구 선생. 장제스는 이때부터 실질적으로 임정을 돕기 시작한다.(박학성 유화) /백범김구기념관

독립운동가 정화암은 해방 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솔직하게 말합시다. 그때 독립운동 안에 모든 파벌이 다 생겨가지고 동(東)으로 갈 사람은 동으로 가고 서(西)로 갈 사람은 서로 갔는데, 그때에도 변함없이 임정의 간판을 고수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백범입니다. 도산 안창호도 상해에 있었습니다만… 임정 간판을 끝까지 고수해야겠다는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참고=여시동 저 '인간적인 책')

김구, 전 생(生)을 바친 애국(愛國)

* 안악사건: 1910년 11월, 안명근이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을 모집하다가 황해도 신천지방에서 관련 인사 160명과 함께 검거된 사건

문갑식 기자의 기인이사(奇人異士): 백범 김구와 공주 마곡사

 

[출처] 이 기사의 출처는 "조선일보" 입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8/02/201608020201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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