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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독서감상문 쓰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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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 소개

수상작 소개 상세내용
제목 당신의 흔적을 되새기며
작성자 김태희(대련국제학교) 개최일 2019-10-30 조회 2440

당신의 흔적을 되새기며


중국대련국제학교

11학년 김태희

 

작년 겨울 방학 한국을 방문했을 때, 엄마와 함께 한 교회에 참석 했었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근처 떡볶이 집, 옷 가게부터 엄마가 대학시절 다녔던 길을 걸으며 엄마의 옛 추억을 들여다봤습니다. 갑자기 바로 뒤에 효창공원이 있는데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다 하시면서 제 손을 끌고 그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하셨습니다. 아마 김구선생님 기념관을 보여주고 싶은 의도였던 것 같습니다. 떡볶이며 자잘한 선물이 손에 들려있던 나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주저하며 따라 나섰습니다. 다행히 한 낮의 온도가 참아낼 정도의 추위여서 불평 없이 갔던 것 같습니다.

 

공원 한편에 단정하고 엄숙한 흰 건물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는 나는 그곳을 들어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어색했습니다. 김구 선생님은 조금이나마 들어본 적이 있는 분인 것은 참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계단을 밟았습니다. 입구를 들어서자 태극기 앞에 김구 선생님의 흰 동상이 앉아 계셨습니다. ‘제가 선생님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해 죄송합니다.’ 부끄러운 목례를 드리고 전시관 안쪽을 향하여 들어갔습니다.


이렇게 선생님과의 만남 덕분에 『백범일지』라는 선생님의 자서전을 읽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집필한 이유를 서두에서 밝히 십니다.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에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내가 지낸 일을 알리자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권이다.”

『백범일지』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출생부터 임시정부 전 까지 상권, 그 이후 조국 광복 투쟁사를 그린 하권과 나의 소원을 담은 부록 편으로 기록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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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선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아버지 김순영, 어머니 곽낙원 여사 사이에서 가난한 농부의 외동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신분질서의 불평등에 대항하여 학문에 매진하셨습니다. 그러나 과거를 치르기 위해 도착한 그 곳까지 부정부패가 횡행하는 조선의 현실을 보시고 과거를 포기하셨습니다. 그 후 동학에 가담하셔서 무너져 가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 일 하십니다. 하지만 동학군은 참패를 거두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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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선 수차례 옥고를 치르시는데 치하포에서 일본인을 처단한 후 “국모의 원수를 갚을 목적으로 이 왜놈을 죽인다.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 라 써서 벽에 붙이셨습니다. 이 일로 체포되어 고문과 사형을 언도 받았습니다. 기적이라 해야 할까요? 사형 집행장 앞에서 고종황제의 명으로 사면을 당하는 장면은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는 사형 당일 “처형대로 갈 시간이라야 한나절이나 남았을 뿐이지만 먹고 책 읽고 사람들과 얘기 나누는 일을 평상처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선생님의 의기 앞에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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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서 가르치시는 일에 참 열심을 내셨던 부분이 내 맘을 사로잡았습니다. 내 생활의 거의가 학교에서 보내고 있고 이 상황에 감사해 본 적이 없었는데, 우리가 미래를 꿈꾸고 발전시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교육의 혜택 이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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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악사건으로 체포 되어 동틀 때까지 고문을 당하신 후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거듭 씹어대는 저 왜구처럼 일에 밤새워 본 적이 몇 번이었던가? 이렇게 자문해 보니 온몸이 바늘침대에 누운 듯 통절한 중에 내가 과연 망국노 근성이 있지 않은가 싶어 부끄러운 눈물이 가득 찼다.” 이 대목에서 그 힘든 시간을 이겨낸 선생님의 마음자세를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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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경무국장 시절 “나의 말 한마디 거동 하나 모두 <김구>라는 제목의 책자에 상세히 기재되었건만 어떤 정탐도 그 사실만은 왜놈에게 보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중략) 나는 이것 한 가지 일만 보아도 우리 민족의 애국 정성이 족히 장래에 독립의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예견한다.” 첩자 까지도 사랑 하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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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셨습니다. 이때도 본인의 부족함을 내세워 한사코 사양 하셨습니다. 하지만 지금을 사는 우리는 선생님께서 자유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셨었다면……. 많이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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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을 창설하여 연합군과 함께 혁혁한 성과를 올렸습니다. 그러던 중 일본이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모두들 태극기를 흔들며 기뻐하던 광복의 순간에 선생님께서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라고 참담함을 토로하셨습니다. 그리고 걱정하셨던 앞일은 우리 민족에게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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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고된 독립투쟁의 역사를 끝내고 고국을 떠나신 지 27년 만에 돌아오셨습니다.

가슴에 눈물로 묻어 두셨던 큰 딸과 장남의 죽음, 아내의 죽음, 어머니의 죽음 중국에서의 힘겨운 생활도 너무 덤덤하게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와의 마지막 장면은 수식 하나 없이 써내려 가셔서 더 슬펐습니다. 해방 후 이 분들의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하는 일을 서두르신 것을 보며 그 때 큰 거사를 치르러 가는 두 분 보다 보내야 하는 선생님의 마음은 얼마나 더 힘드셨을지 짐작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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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백범김구기념관을 나올 때 ‘부끄럽다’ 이 단어가 내 머리를 스쳤습니다. 또, 『백범일지』를 다 읽은 후에는 ’고맙습니다’란 말 밖에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나를 돌아봅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하나님이 내게 물으시면’ 선생님을 알게 된 나는 이제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나에게 대한민국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불행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국이 아닌 이 곳 중국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본국 밖에서 만 살아온 나는 국가의 건제함이 무엇인지 피부로 느끼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 국가 간의 문제가 있을 때 한파처럼 매섭게 몰아치는 한국인의 경제 위기도 어리지만 느껴봤었습니다. 다른 나라의 국경을 넘을 때마다 우리나라의 세계적 위상 덕분에 불편함 없이 다닐 수 있었음도 경험 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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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를 읽은 나는 이전과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감히 ‘애국’ 이라는 단어는 붙일 수는 없겠지만, 희망이라곤 찾을 수 없던 그 시절 자신들의 목숨을 내던져 희망의 불씨를 만들어 끝까지 지켜내신 당신들의 나라를 잘 지켜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학생인 제가 더 특별히 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지금 하고 있는 공부가 이 나라에 도움이 되도록 살아가겠습니다. 그리고 피 흘려 이 나라를 지켜내신 분들의 숭고한 뜻과 당신들의 이름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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