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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독서감상문 쓰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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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 소개

수상작 소개 상세내용
제목 열중의 아홉 번째 사람으로, 범부의 자리에서 조국을 위하여
작성자 박규빈(쌍용중) 개최일 2011-05-13 조회 1958

"서울행 122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들은......."

     일요일 오후. 작년까지만 해도 청심 국제중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저는 매 주말 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떠나 기차를 타고 경기도 가평으로 가야 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이에 집을 떠난다는 부담감에 짓눌린 저는 여느 때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그 때, KTX 역 내 '역사전시회'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 한 장이 저의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바로 백범 김구 선생님의 서거 사진. 선생님께서 머리에 총을 맞고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채 누워 계시는 그 모습에 충격과 함께 말 못할 감정들이 밀려왔습니다. 무거운 책임과 사명을 남기고, 그토록 사랑하는 조국과 국민을 떠나는 선생님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백범일지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의 위협 앞에, 어린 두 아들에게 선생님이 하신 일을 알리기 위해 쓰신 일기이자, 선생님의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경륜과 소회를 동포들에게 고한 유서의 의미를 담고 있는 책입니다.

     김구 선생님은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학구열이 남다르셨던 선생님은 동학에 입도해 활동을 하다 좌절되어 의병 활동을 하러 청나라로 가셨으나, 그 또한 실패해 다시 돌아와 때를 기다리던 중 1896년 2월, 치하포로 가게 되셨습니다. 도중에, 선생님은 국모(명성황후)의 원수를 갚으려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군 중좌를 처단한 사건으로 인천 감옥에 갇히어 사형 선고를 받으시게 됩니다. 선생님은 자신의 행동이 정당한 것이었다며 당당하게 심문에 임하여 전국의 의인들이 구명 운동을 펼치게 되었고, 처형 직전, 고종 황제가 이 사건을 알게 돼 사형 집행 정지 명령을 내려 살아나시게 됩니다.

     후에 감옥을 나온 선생님께서는 마곡사로 들어가 승려가 되셨고, 곧 승려 생활을 그만두고 애국계몽운동과 신민회 활동에 힘쓰셨는데, 이로 인해 얼마간의 투옥 생활을 하시게 되셨습니다. 이 때, 선생님은 옥중에서 심한 고문을 당하셨는데, 고문을 하는 일본인들이 밤낮 일하는 것을 보시고 '내가 저 왜놈처럼 나라를 위해 밤새워 일해 본 적이 있는가?'라 자문하시며 부끄러움에 눈시울이 뜨거워 지셨다고 합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 배우는 것도 꺼릴 텐데, 적의 모습에서 나를 비추어 곧추세우는 모습에 선생님의 겸손함과 대인다움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열 사람이 있다면 아홉 번째 사람이 되겠다는 뜻으로 이름을 구(九)로 바꾸시고, 백정과 범부의 자리에서도 조국을 위할 것이라는 뜻으로 호를 백범(白凡)이라 지으신 것도 이 때입니다. 자신이 으뜸 되기보다는 나라와 국민을 진정으로 섬기는 선생님의 신념이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그 옛날, 선생님의 옷깃을 흔들었던 바람의 내음이라도 느낄 수 있을까.......

저는 아버지께 부탁드려 공주에 있는 마곡사를 방문했습니다. 마곡사에는 선생님이 머무셨던 '백범당' 이라는 건물이 있었고 해방 후 동지들과 찾아와 기념식수를 하신 향나무가 변함없는 선생님의 애국심을 말해주듯 아직도 푸르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마곡사에서 은신하던 선생님은 법명을 '원종'으로 출가를 하게 되는데, 백범 일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사제 호덕삼이 머리털을 깎는 칼을 가지고 왔다. 냇가로 나가 삭발 진언을 쏭알쏭알 하더니 내 상투가 모래위로 툭 떨어졌다. 이미 결심은 하였지만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

선생님이 삭발하셨던 바위 앞에 서 있노라니 선생님의 착잡한 심경이 전해져 오는 듯 하여 저는 말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고 서있었습니다.

 

     선생님은 1917년 2월, 중국으로 망명하셨습니다. 농사일을 감독하는 직책을 맡게 되신 선생님은 솔선수범하여 사람들을 이끌어 마을을 훌륭하게 발전시키고, 사람들에게 많은 존경도 받았습니다. 선생님의 성실함과 추진력이 여기에서도 발휘된 것입니다. 그 후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 등을 계획하고 실행하셨습니다. 또한 광복군을 창설하고 훈련하던 중, 일본은 갑자기 항복을 해 버립니다. 그로 인해 혼란해진 임시정부를 다시 세우고, 그리던 한국에 돌아와 순회를 하는 것으로 '백범일지'는 끝납니다.

 

     저는 이 책에 덧붙여, 다른 사람의 시각에서 본 선생님은 어떠한 분이셨을까 하는 궁금함과 서거 후의 상황도 알고 싶어 도서관에서 비서 선우진 씨가 쓴 회고록 '백범 선생과 함께 한 나날들'도 읽게 되었고, 독립 기념관에서 선생님과 관련된 자료도 찾아보았습니다.

     백범 일지에 비춰진, 열정으로 뭉쳐진 다소 거친 모습 외에도 '백범 선생과 함께 한 나날들' 에서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는 온화하시고 인자한 선생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김구 선생님께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모스크바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셨습니다. 분단으로 인해 우리 민족이 겪게 될 아픔을 예측하셨던 것일까요?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가 나자, 이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북한과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하셨고,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셨습니다.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셨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백범 선생님의 암살 계획이 있다는 소리가 자주 들렸지만, 선생님은 "나는 나라를 위해 왜놈이 죽일 일은 했어도 내 민족에게 죽을 일은 안했다" 고 하셨다고 하는데, 비록 그 자리엔 없었어도 그 믿음을 지켜드리지 못해 정말 안타깝고 부끄럽습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완전한 자주독립 을 염원하셨던, 평화와 자유를 정치이념으로 삼았던, 이기적 개인주의를 버리고 문화국가를 이루고자 하셨던 백범 선생님의 사상은 6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빛이 바래지 않고 우리들 가슴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오는 4월 13일은 임시정부수립 92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김구 선생님의 높은 뜻을 이어받아 우리 대한민국이 진정한 평화의 시발점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하며, 김구선생님께서 자주 읊으시던 구절을 되뇌어 봅니다.

 

 

踏雪野中去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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