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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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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11. 26. 새로운 반역을 징치하자
오늘 11월 23일은 내가 환국한 지 1주년이 되는 날이다. 나의 연령이 고희를 넘어 비록 신경이 지둔하고 혈기가 쇠약하였다 할지라도 목석이 아닌 이상 어찌 느끼는 바가 없으랴. 그러나 친애하는 동포들의 친절한 부탁을 한 가지도 이행 못 한 나로서 이 날, 이 땅에서 더구나 이 환경에서 어줍지 않게 감상이나 혹은 정론(政論)이나 발표하고 앉아 있는 것은 양심상에도 허용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남의 조소거리가 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하루를 반성과 침묵으로 보낼까 하였더니 뜻밖에 오늘이 서울신문의 첫돌이라고 가의(賀意)를 표하는 보람으로 일편의 문장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다. 강화에서 돌아와서 여장도 풀기 전에 받은 청구이니 졸문졸필인 나에게는 굉장한 난사다. 그러나 남의 잔치를 빌어서 무료한 내 심서(心緖)의 한 구석이라도 풀어볼까 하여 이 붓을 들었다. 본래 뜻밖의 일이 되어 준비가 없음으로 무조건 무질서하게 쓰는 수밖에 없다. 어그러짐이 많으나 따뜻한 양해로써 나의 솔직한 것만 살피고 읽어 주시기를 바란다.

나의 심서를 언제든지 요란케 할뿐만 아니라 서늘하게 하며 뭉클하게 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일제시대만 못하다'는 소리다. 내가 입국한 지 수삭이 되지 못하여 이 소리를 듣기 시작하였는데 근일에는 경향각지에서 이 소리는 있는 것 같다. 이 소리를 하는 사람들의 양심도 우리가 다시 검토할 필요는 있는 것이나 그 소리가 나오는 사실을 무시할 수가 없는 까닭에 현실을 현실대로 인하고 논하는 것이다.

전쟁와중에서 장시일을 경과하였고 또 왜적의 퇴각과 동시에 더 한층 큰 파괴를 당한 우리에게 물질적 혜택이 극도로 빈약할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일제시대만 못하다'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정신상으로는 무한한 위안을 받아야만 할 것인데 사실은 그렇지도 못하다. 물론 물질의 혜택이 결핍한데 정신상 고통이 없기가 어렵지만 그것도 정도 문제다. 과연 금일에 대한 우리는 울자 하면 상서롭지 못하고 웃자 하면 유쾌한 것이 없이 되었다. 이와 같은 모순의 현상을 개선할 의무와 능력을 가진 사람은 물론 위정자인 것이다. 그 중에도 더 큰 책임을 진 사람은 어느 각도로 보더라도 한인관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보라, 입으로는 통일을 고조하면서 정치단체는 자꾸 제조해 낸다. 주의, 사상의 부동을 빙자하지마는 같은 진영 내에서도 이합이 무상하다. 민족반역의 징치를 고조하면서도 새로 나오는 민족반역은 주의하지도 아니한다. 친일분자 숙청은 마땅하지만 그 죄상을 권형(權衡)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애증을 따라서 용서할만한 자도 기어이 매장하자고만 한다. 그 반면에 친일분자로 지목을 받는 자 중에서 일찍이 왜적 이상으로 왜국을 위하여 충견노릇을 한 무리는 감히 대두도 하지 못하니 혹 그 정상이 경한 무리로도 자숙하는 부분도 없지 아니하나 그러나 소위 황국의 성전을 위하여 글장이나 쓰고 연설쯤 한 것은 문제도 되지 아니한다고 하면서 도리어 발호하는 무리를 대할 때는 구역이 나지 아니할 수 없다. 만일 전국의 지사들이 적의 핍박으로 인하여 한 사람이라도 이것을 피한 자가 없다 하여도 그와 같이 철면피 노릇을 하지 못하려든 허물며 그런 태도를 버리지 아니하고도 지금까지 살아 있는 지도자들이 있는 데야 어찌하랴.

이 밖에 또 공명겸결(公明兼潔)을 부르짖으면서 회뢰(賄賂)의 행위가 공공연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권을 처리할 권한을 맡은 부분일수록 이것이 더욱 심한 듯하다. 통화는 팽창하여서 물가는 점점 고등함으로 민생은 도탄에 있건만 돈은 점점 말리어서 극소수의 모리배와 부호의 손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리하여 이로부터는 중산계급 소시민까지 적빈(赤貧)한 무산층으로 몰락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 모리배들은 그 위험한 상태를 도외시하고 절대다수의 동포를 기만하여 우롱하면서 그들의 주머니를 짜내고 있다. 내가 여기 지적하는 모리배는 동포의 이익을 무시하고 자사자리(自私自利)만을 위하여 분주하는 정객들도 포함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예는 매거할 필요조차 없거니와 그 원인을 생각하면 일본 제국주의가 직접 간접으로 끼쳐 준 심리상 독소가 그대로 잔재하는 까닭이다.

여하간 이러한 독소가 잔재하고 있는 한 모든 정형은 일제시대와 같던지 도리어 그만도 못할 것이다. 청이 남에서 나왔지만 남보다도 청하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일언으로써 폐하면 우리에게 잔재한 심리상 독소를 깨끗이 숙청하지 못하면 내로 민족적 통일과 외로 국제적 동정은 도로무공일 것이다. 애심대어심사(哀心大於心死)라 하니 어찌 경계하지 아니하랴. 우리가 혁명을 완전히 성공하려면 반드시 먼저 혁심(革心)을 하여야겠다.

조국의 완전한 독립과 동포의 자유로운 번영을 위하여 신 국가를 건설하려는 우리는 먼저 새로운 심리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나의 감상이 어찌 보면 설교와도 비슷하지만 나는 갈수록 이것을 심각히 느끼고 있다.

서울신문이 탄생한 지는 불과 1년이지만 그 동안에 여론지도와 민지계발(民智啓發)에 위대한 업적을 내어 실로 우리의 독립운동에 공헌이 지대하였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로 경의를 표하는 바이어니와 앞으로는 심리건설을 위하여 특별한 노력이 있기를 간망한다. 그리하여 하루라도 속히 '일제시대만 못하다'는 소리를 근절시키는 동시에 우리의 자주독립을 촉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