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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직하게 임시정부를 꾸려나간 '숨은 재상' 차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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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6-11-10 조회 65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차리석 선생은 갖은 고초를 극복하며, 의정과 행정 등 다방면에 걸친 활동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켜왔던 독립운동가다. 충칭(重慶·중경) 임시정부에서도 국무위원과 중앙감찰위원장을 역임하면서 광복군의 대일항전을 지원하는 등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했으나 그 기쁨을 채 느끼기도 전인 그해 9월 9일에 충칭 임시정부 청사에서 별세했다.

차리석,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일제 탄압에 옥고 치르고, '독립신문' 기자로
차리석 선생은 어릴 때 한학을 배웠으나 신(新)학문에 뜻을 두고 1900년에 숭실중학에 입학하여 정규과정 첫 졸업생이 되었다. 1907년 도산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후진을 길렀다.

이어 안창호와 양기탁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 평양지회에서 활동하였다. 선생은 도산의 뜻을 좇아 교육구국운동에 주력하던 중 일제가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데라우치 총독 암살기도 사건', 즉 '105인 사건'에 연루돼 3년여간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19년 평양에서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더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펼치기 위해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선생은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기자로 활동하다가 편집국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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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징모처 제3분처 사진(1941.3. 중국 중경) 제일 아랫줄 왼쪽부터 박찬익, 조완구, 김구, 이시영, 차리석 순이다 /독립기념관

임시정부 재건, 인재 양성…
인생을 바친 독립운동

선생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재직하면서 도산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통한 임시정부의 재건에 힘을 쏟았다. 또 도산이 주도하는 흥사단 원동(遠東)위원부에 가입하여 청년인재 양성에 힘썼다. 1932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출된 선생은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국무위원 또는 국무위원회 비서장으로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그러나 1935년 내부 분열로 다수의 국무위원이 임시정부를 떠나버리자 임시정부는 와해 위기에 처하였다. 이에 선생은 임시정부 요인들을 찾아다니며 설득, 복귀하게 함으로써 임시정부의 명맥을 유지시켰다. 또한 충칭 임시정부에서도 국무위원과 중앙감찰위원장을 맡아 광복군의 대일항전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을 쉬지 않았다.

* 임시의정원: 1919년 중국 상하이에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입법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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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12일 차리석 선생 발인 사진 /독립기념관
차리석 선생은 백범 김구 주석이 독립운동의 대부가 되도록 뒷바라지한 주역이었고 도산 안창호 선생의 충실한 측근이었다. 역사학자들은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적 삶을 산 그를 '독립운동계의 재상'으로도 표현한다.

지도자는 전면에 내세우고 자신은 청렴과 강직으로 소임을 다했던 '음지의' 독립운동가였던 선생은 충칭 임시정부에서도 국무위원과 중앙감찰위원장을 맡아 광복군의 대일항전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을 쉬지 않았다. 그는 임시정부의 환국을 준비하던 1945년 9월 9일, 광복을 맞은 지 불과 25일 만에 안타깝게도 과로로 순국했고 꿈에 그리던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참고=국가보훈처, 여시동 저 '인간적인 책')

차리석, 전 생(生)을 바친 애국(愛國)


 

[출처] 이 기사의 출처는 "조선일보" 입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1/08/201611080087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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