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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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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을미사변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6-10-04 조회 248

[1895년] 을미사변

 

메이지 유신 이후 조선의 지배를 대외침략정책 제1의 목표로 삼고 있던 일본에게 청과 러시아가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1895년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이를 관망하던 러시아는 일본의 행동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삼국간섭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에서도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일본세력을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고, 반일세력의 핵심인물이 명성황후였다.

청일전쟁 직후 전력을 소모한 상태에서 러시아를 상대할 준비를 갖추지 못한 일본은 직접 조선쪽을 상대하여 러시아와의 연결고리를 끊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반일세력의 핵심이자 러시아와의 연결고리인 명성황후를 제거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10월 8일 새벽 일본인패들이 대원군과 그의 아들 이재면을 납치하여 경복궁으로 향했다. 일본인 교관은 야간 훈련을 실시한다는 구실로 조선군 훈련대를 경복궁까지 유인했다. 계획이 개시된 것은 새벽 5시였고, 경복궁 담을 넘어간 일본인들이 일본군의 엄호하에 광화문을 지났다. 

일본군에 이어 일본인들이 호위한 대원군의 가마와 훈련대가 밀려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궁궐 시위대병사 8∼10명과 홍계훈(훈련대 연대장)이 희생되었다. 일본군의 습격은 북문으로부터도 있었다. 광화문쪽에서 총성이 울리자 이미 북서쪽의 문(추성문), 북동쪽의 문(춘생문)을 통과한 별도의 일본군이 북쪽의 문(신무문)을 공격해 들어갔다.

경복궁에서는 숙위 중이던 시위대 교관 다이(William McEntyre Dye, )와 연대장 현흥택의 지휘하에 비상 소집된 300-400명의 조선군 시위대가 저항하였으나 무기의 열세로 곧 무너졌다. 이후 왕후의 거처에서 만행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군은 사방의 출입구를 봉쇄하였다.

사건 이후 사건의 주모자들이 감옥에 수감되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증거불충분'으로 전원 무죄 방면하였다. 범죄자들은 일본의 관민으로부터 영웅 대우를 받았고, 주모자였던 중장 미우라가 석방된 후 동경에 도착하자 일왕은 그의 '노고'를 치하하기까지 하였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은 단발령과 함께 19세기 말 항일의병 봉기의 원인이 되었으며, 또한 신변이 위태로워진 고종이 이듬해 2월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2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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