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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독서감상문 쓰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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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 소개

수상작 소개 상세내용
제목 만중일심이 되어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리라(나의 소원)
작성자 선하라(벌교고) 개최일 2018-07-18 조회 3008

만중일심이 되어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리라(나의 소원)

 

벌교고등학교

2학년 3반 선하라

 

나는 2017 최순실-박근혜 국정농단 사건이 발발했을 때 그들의 탄핵을 요구하는 100만 촛불 중 한 명이었다. 지리적으로 정말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서울까지 올라가서 탄핵을 울부짖었던 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훼손하는 행위를 저지른 그들을 가만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17년 경험한 바 있듯이 우리의 역사는 끊임없이 연대하고, 투쟁해왔다. 그 예로서 동학농민운동, 삼별초 항쟁, 6월 민주항쟁, 최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있다. 그리고 나는 그 투쟁의 역사 가운데에서 백범 김구 선생을 기억한다.

 

1. 교육자로서의 김구

김창암이라는 아명으로 조선에 태어난 그는 너무나도 평범하게 태어났으나 그 스스로가 평범하기를 거부했다고 나는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김자점의 난으로 안동에 내려와 양반 노릇도 하지 못한 채 농사를 짓는 게 대부분인 그의 가족 사이에서 공부를 하겠노라 다짐한 것부터가 그의 비상함이 보이지 않는가. 비록 여러 상황들로 인해 벼슬도, 실용문서도 포기하였고, 제대로 된 서당이라고는 12살 때 아버지께서 마련해주신 청수리 이 선생을 제외하고 딱히 변변찮은 학력이라 내세울 것 없는 그였지만 그는 결국 민족의 광복에 힘쓰는 교육자이자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그에게 있어 교육이란 민족을 일깨울 수 있고, 그 일깨워진 민족으로 하여금 조국의 광복부터 시작해 우리의 민중에게 새로운 철학과 학문의 자유를 느끼게 해줄 수 있는 것. 아마 그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백범 김구 선생은 그래서인지 장련공립보통학교를 시작해 있는 힘껏 그들의 제자 양성에 힘썼다. 그렇다. 나도 백범 김구 선생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교육을 통해 우리는 진보해왔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힘쓸 수 있는 인식을 확립해나갈 수 있었다. 교육을 기반으로 한 조국 광복. 그는 굳이 땅이 척박하고 사람들이 꺼려하는 신천 동산평의 농감이 되어 악덕 지주들을 꾸짖고 소작인들이 제대로 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고자 살해위협을 무릅쓰면서까지 농경을 일구어냈다.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교육이 아니었다. 그의 솔선수범과 올곧음을 밀고 나갈 수 있었던 그 추진력이 신천 동산평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백범 김구 선생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광복이 이루어진지 약 70여 년이 지난 지금의 교육은 너무나도 달라졌다. 그가 말한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라는 교육의 본질은 어느새 과열된 입시경쟁과 끊임없는 스펙 쌓기로 변질되어 버렸다. 교육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학생들은 치를 떨고, 어른들은 이제 형식적인 하나의 관례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게 우리는 매일을 교육과 함께 숨 가쁘게 달려가고 있다. 그가 교육을 통해 자유와 민주주의가, 그리고 짧게는 조국광복 의식을 일깨우고자 했던 것처럼 지금의 우리 역시 교육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의 바람은 정치와 우주와 인생이 녹아든 교육이 다시 한 번 실현될 수 있도록 돕는 이 시대의 교육자가 다시 한 번 나타나는 것이다. 교육으로서 다시 한 번 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기를 바란다.

 

2. 독립운동의 아버지로서의 김구

김구 선생의 조국을 위한 헌신의 시작은 아마 종교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생각해보자면 아마도 치하포 사건이 아닐까 싶다. 국모보수로 일본인을 처단한 치하포 사건을 통하여 인천감옥에서 몇 여년의 시간을 보냈는가. 모두가 일본 교도관들에게 굽실거리고, 국모가 시해된 그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조차 꺼내지 못할 때 그는 재판장에서 당당히 일본인들에게 고한다.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국모를 시해하였느냐. 내가 살아서는 이 몸을 가지고,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맹세코 너희 임금을 죽이고 너희 왜놈들을 씨도 없이 다 죽여 우리나라의 치욕을 씻을 것이다.”

사형이 내려질지도 모르는 그 상황에서 김구 선생의 그 대범함은 지금도 영화로 회자될 만큼 엄청난 용기와 결심, 그리고 정의로움이 있었기에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후 신민회 105인 사건으로 또다시 옥에서 수감 생활을 할 때 그는 끊임없이 그의 마음을 다잡곤 했다. 교도관들이 말한 것처럼 일제의 모난 돌로서 과연 다시 세상에 나가서도 석회처럼 녹아드는 것이 아닌 끝까지 투쟁할 수 있을 것인가. 그의 머릿속은 오직 광복에 대한 염원과 일제와의 투쟁의 중심에 있는 그 자신에 대한 성찰 뿐 이었다. 그래서 밤낮으로 계속되는 고문에도 그는 그 자신이 망국노의 근성이 있지 않은가 하는 고민을 거듭하며 독립을 위해 훗날 그가 행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곤 했다. 치열한 고민 끝에 그는 옥에서 2년 형을 남기고 나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을 시작으로 수많은 거사와 정책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물론 그의 가족들이 보기에 그는 결코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은 아니었다. 두어 명의 딸 뿐 아니라 아내의 임종조차 함께하지 못했고, 신이, 인이와 함께한 세월이 결코 많지 않다. 허나 그는 그만큼 조국을 위해 일평생을 바쳤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를 통하여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계획되고 시행되었으며 이 의거들을 해외 동포들에게 알리며 30원이 없어 정부 청사 유지에 어려움을 겪었던 당시의 상황들을 다시 일으킬 수 있었다. 그의 편지정책을 비롯한 다양한 군사정책과 사람들을 포용하고 주변국들과의 끊임없는 교류와 외교정책들을 통해 조국광복의 희망의 불씨를 다시 타오르게 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김구 선생은 우리 국민들에게 계속해서 을사늑약반대 상소운동과 황해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국민들의 힘이 필요함을, ‘왜’에 맞서 싸워야함에 대하여 열성을 토하고 다녔다. 그를 기억하자. 우리는 그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의 연대와 투쟁을 통해 그 어떤 나라에 편입되지 않고, 종속되지 않고 비로소 우리만의 헌법과 우리만의 자유와 우리만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 ‘내 한 목숨 바쳐 우리의 자유를, 우리의 민족을 옥죄고 있는 그들의 중심을 사살하리라.’라는 원대한 목적을 가지고 힘썼던 수많은 영들을 기억하자. 살해 위협은 기본이요, 미국인 선교사 집에 은거하며 운동가들을 돌봐야했던, 일본의 끊임없는 공격에도 운동가들을 비롯한 그들의 가족들까지 챙기고자 했던 그. 3·1 운동부터 광복까지 우리의 힘으로 국가를 건설할 수 있으며 흔들릴지라도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우리의 민족성을 임시정부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고, 이를 이루어낸 그. 그를 기억하자. 무척이나 체계적으로 우리나라를 식민지화 시키고자 하는 큰 목적을 가진 일본을 안주하게 하지 못하게 했던, 우리 국민들은 결코 다른 나라에 종속되지 않고 오로지 우리의 주체성을 지키고자 한다는 그 메시지를 몸소 실천한 그를 기억하자.

 

3. 민족의 역사를 일구어내고자 했던 김구 뒤에 서있는 어머니, 곽낙원 여사

나는 김구의 중심에서 곽낙원 여사를 꼭 잊지 않았으면 한다. 죽는 날까지 아들과 아들의 원대한 꿈을 이루어주고자 끝없이 믿고 지지해주며, 모든 면에서 도움을 준 그녀. 치하포 사건으로 인천옥에 수감되었을 때 아들을 위하여 삯바느질까지 해가며 계속해 사식을 제공했고, 신민회 사건으로 인해 다시 한 번 수감되었을 때는 그의 아내 최준례 여사와 함께 자식들을 키우는데 힘썼으며 잠시 승려가 되겠다며 절에 들어갔을 때는 믿고 기다려주라는 그 말 한마디를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김구 선생의 어머니의 모성애는 정말 남달랐다. 그의 아내가 이 세상을 떠나고 인이와 신이만이 남았을 때 김구가 제대로 그를 돌봐주지 못할 것을 알고 손자들 양육에 힘썼던 곽낙원 여사는 중국 상해를 가는 그 우여곡절 속에서도 지혜를 발휘하여 다시 아들의 곁으로 돌아갔으며 상해의 형편이 어려워 다시 본국으로 귀국할 때는 여비가 바닥나자 스스로 인천의 동아일보 지국을 찾아가 차표를 비롯한 안전을 보장받는 등의 지혜를 보였다. 곽낙원 여사의 말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다음과 같다.

“나는 지금부터는 ‘너’라는 말을 고쳐서 ‘자네’라 하고 잘못하는 일이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는 쓰지 않겠네. 들어보니 자네가 군관학교를 하면서 많은 청년들을 거느린다니 남의 사표가 된듯하여 나도 체면 보아주자는 것일세.”

더 이상 그녀는 김구 선생을 단지 아들로서만 보지 않고 그의 공덕을 인정하고 그를 존중하겠다는 것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한 것이리라 생각한다. 그렇다. 그녀는 일평생을 본인의 아들을 위해 힘써왔고, 비로소 그 아들이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음에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우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더 이상 그 아들이 너무나도 훌쩍 커버린 사실에 알지 못하는 씁쓸함 역시 있었던 것이 아닐까. 김구 선생은 생전 이창매 묘를 지나며 그의 가족과 어머니를 회고한 적이 있다. 나는 이창매의 묘에서 본인을 성찰했던 김구 선생을 보며 나 자신에 있어서도 다시 한 번 지난날을 돌이켜 보았다.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나는 나의 부모님을 진정으로 공경하고 있으며 나 역시도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당당히 ‘yes’라 대답할 수 있다고 확언은 못한다. 그동안 내가 써왔던 수많은 편지와 선물들은 그저 편지와 선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집에 오래 머무는 기간이라곤 방학밖에 없었던 나는 부모님께 전화 한 통을 드리지 않아 속 썩인 적도 있었고, 때로는 부모님의 애정표현에 소스라치게 거부했던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내가 학교에 오가는 길을 항상 함께해주셨던 당신은,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아 그 역시 속상했겠지만 언제나 나에게 꾸짖음보다는 묵묵히 나를 믿어주었던 나의 부모님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도 감사할 뿐이다. 비교할 수 없이 과분한 사랑을 주었던 나의 부모님은, 내가 지금까지 내가 배우고 사유하고 꿈을 꿀 수 있게 해준 원동력과 같은 사람이다. 비록 나는 김구 선생이 아버지를 위해 했던 것처럼 허벅지를 잘라낼 수는 없지만 나의 방식을 통한 효를 이제 실천하고자 한다. 낯간지럽다 할지라도, 아직은 어색할지라도 말이다.

 

『백범일지』 이후에 김구 선생은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통일을 끊임없이 주장하시다가 74세의 나이에 이 생에서의 운명을 다하셨다. 백범 김구 선생의 생에 있어 우리는 수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나는 그가 강하게 열망했던 그의 꿈이 지금의 우리에게 가장 큰 가치 있는 무언가로 다가왔다. 어릴 적 꿈꿔왔던 수많은 것들은 점점 커가면서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하고 끝내 꿈으로서만 남겨두곤 하는 것이 우리이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하였고, 집안이 넉넉한 형편도 아니었지만 임시정부의 경무국장부터 시작해 대표가 되어 이 나라를 이끌어왔고, 끝끝내 광복까지 이루어낼 수 있었다. 더 이상 학벌이 안 된다고 포기하지 말고, 조금 가난하다고 해서 꿈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못할 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공부를 특출 나게 잘하지 못하더라도, 집안이 엄청 좋은 것이 아니더라도 나는 나의 꿈을 포기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그의 일생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고. 그리고 지금 약 400여 쪽 분량의 활자를 다 읽고 그를 기억하는 글을 남기고 있는 나의 일생 역시 평범치 않을 것이라고. 그를 완전히 닮을 순 없지만 그래도 노력해 볼 거라고. 그의 소원이 대한독립이었다면 나의 소원은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는 국가, 그리고 그 세계의 발판 마련의 중심에 있는 ‘나’를 꿈꾼다. 내가 정치인이나 법조인이 되어 직접적인 무언가를 변화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좋겠지만 그보다는 조국광복을 일깨울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침해되었음에도 이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알려줄 수 있는 김구 선생과도 같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 시민단체에서 국민을 대표하여 국가를 감시하고, 소외되어 홀로 세상을 상대로 싸우고자 하는 이들과 동행하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나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너 하나가 움직인다고 해서 이 세상이 바뀌겠냐고.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나 혼자 소리 치고 투쟁 한다고 해서 바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범 김구 선생께서 보여주었던 그 담대함과 어떠한 어려움에도 포기하지 않고 뜻을 펼치고자 한 올곧음을 이어받는다면 서서히 바뀔 수 있는 건 많다. 단번에 조국광복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만중일심이 되어 비로소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던 그때를 떠올려 보자. 나의 움직임으로 누군가에게는 버팀목이 되고, 누군가에는 그동안 외면하고 있었던 진실에 다시 한 번 마주하게 될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는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고, 내가 이 세상에 왜 필요한지가 정의된다. 한국이 직면한 수많은 문제와 함께, 전 세계에 평화와 행복이 깃들 수 있도록 끊임없이 뛰어다니는 나. 김구 선생님이 광복을 위해 계속해서 움직여왔던 것처럼 이제 나도 세상을 바꾸기 위해 다시 일어나 힘차게 뛰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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