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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독서감상문 쓰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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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 소개

수상작 소개 상세내용
제목 처절한? 처절한! -『백범일지』를 읽고 -
작성자 임보배(상지여고) 개최일 2011-05-27 조회 2109

처절한? 처절한!

-『백범일지』를 읽고 -

 

상지여자고등학교 3학년 진반 24번 임보배

 

‘처절한 민족주의자.’ 한국 근·현대사 수업 시간에 초대 대통령으로 적합한 사람은 김구 선생이 아니었나 하는 주제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김구 선생은 소련도 미국도 배제하고 오로지 자주적 독립국을 염원한 ‘처절한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에 미국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운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사실 그때에는 ‘처절한’이라는 말이 가슴에 잘 와 닿지 않았었는데 『백범일지』를 다 읽은 지금, 문득 떠오른 그 말이 내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 『백범일지』 속 그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나라,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에 나 또한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민족을 향해 외치는 그의 애절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시려오기도 한다.

책의 첫 페이지를 펼쳤다. 그가 이 책을 쓴 동기, 책의 서문이었다.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언제 죽음이 닥칠는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자신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썼다는 『백범일지』는 한편으론 그의 유서이기도 했다. 책 서문에 나의 마음을 끄는 그의 말이 있었다. “내가 만일 민족의 독립 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이 있다면 그만한 것은 대한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 온 것이다.” 그는 그렇게 자기 자신을 한없이 낮추며 겸손했다. 담담히 써 내려간 짧은 서문에서도 그의 인품이 느껴졌고 담담함 속에 보이는 그의 의지는 이 일지가 또한 백성들에 대한 당부임을 직감케 했다.

어릴 적 그는 창암, 동학 입도 후에는 창수로 불렸다. 동학교도들을 많이 거느려 ‘아기접주’라는 별명을 얻었고 동학군을 이끌고 전쟁터에 나가기도 했다.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였다. 내가 책상 앞에 앉아 철없는 감상에 젖곤 하는, 나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찬 십대의 마지막. 어린 김구, 그는 전쟁터에 있었고 이미 그 자신을 넘어 민족, 나라까지 가슴에 품은 채였다. 안태훈의 집에서 만난 스승 고능선의 영향으로 압록강을 건넌 그는 의병 활동을 벌이고 귀국하는 길에 일본 낭인 스치다를 살해한다.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구를 죽였노라. 해주 백운당 텃골 김창수.’라고 쓴 성명을 대담히 벽에 붙여 놓는 모습에서 그의 의기를 엿볼 수 있고 청년 김구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다. 몇 달 후, 그 일본인이 일본 육군 중위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첫 번째 투옥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옥중에서도 신문 중 감시하는 일본 순사에게 만국공법 어디에 통상화친조약을 맺은 나라의 국모를 시해 하라는 구절이 있더냐며 호통을 치는가 하면 한갓 부귀영화와 국록을 도적질 하는 마음으로 임금을 섬긴다며 수십 명의 관리를 부끄럽게 하기도 하여 많은 이들의 영웅이 되었다. 허나, 곧 더 많은 해야 할 일이 있음을 깨닫고 탈옥하는데 이후 5년간의 방랑과 모색을 거쳐 근대적 교육 사업에 매진하게 된다. 양산학교의 교장이 되어 교육의 꿈에 부풀었을 무렵, 안명근 사건과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다시 수감 생활을 한다. 그곳에서의 모진 고문에 느꼈던 그의 갈등과 고뇌가 무척이나 솔직하게 서술되어 있는데 금수처럼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를 비난하며 힐책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또 다른 술회의 한 부분을 기억한다. “처음에 심문을 시작한 놈이 불을 밝히며 밤을 새운 것과 그놈들이 온 힘을 다해 자기 일에 충성하던 것을 생각하니 자괴감이 들어 견딜 수 없었다. 나는 남의 나라를 삼키려는 저 왜구들처럼 밤 새워 일한 적이 과연 몇 번이나 있었던가?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 이 구절을 읽은 후 나는 머리를 무언가에 얻어맞은 것 같았다. 어떻게 그러한 고통 속에서 왜구를 보며 나라를 위해 밤을 새운 적이 없음을 한탄할 수 있단 말인가. 또 어떻게 그가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없다는 반성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절절한 나라 사랑에 내 가슴이 저미어 왔고 그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마저 갖게 되었다.

예상치 못하게 일찍 석방되지만 그의 교육의 꿈이었던 양산학교는 일제에 넘어간 후였고 사랑스러운 딸은 아비를 기다리다 죽음을 맞은 후였다. 그는 깊은 회의에 빠졌고 더 큰 이상을 위해 그 당시 세워진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임시정부의 문지기가 되겠다며 찾아간 그는 경무국장의 직책을 맡게 되고, 후에 이념과 노선의 차이로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분화되어 떠나자 홀로 남아 임시정부를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런 그를 찾아 온 이봉창, 윤봉길 의사는 조국을 위해 한 몸 희생할 것임을 약속하고, 그들의 의거는 침체된 임시정부를 살리는 데 큰 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 내에서 큰 지지를 얻게 되어 후일 한국광복군 창설의 밑거름이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졌고 우리나라는 갑작스러운 독립을 맞이했다. 한국광복군이 미국 OSS와 합동 훈련을 하며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고 있을 당시였다. 김구 선생은 망연자실하며 원통해 했다. 자주적 독립을 이루지 못한 나라의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귀국 후 바라본 우리나라는 그가 ‘나의 소원’ 속 절절히 그려 놓은 그런 나라가 아니었다.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그 안, 또 그 안에서의 싸움은 계속되었고 일제시대의 잔재는 청산되지 못한 채 친일파들이 각계각층에 뿌리내려 있었다. 그는 그런 나라를 위해 누구보다 노력했으며 행동했다.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었고 실천하는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늘 말부터 앞서는, 말 뿐인 사람들이 있다. 오늘날에도 말이다. 무수히 내건 공약들은 좀처럼 지켜지지 않으며 국민들의 의견은 무시되기 일쑤다. “민주, 즉 백성이 나라의 주권자인 나라에서 국론을 움직이려면 어떤 개인이나 당파를 움직여서 되지 아니하고 그 나라 국민의 의견을 움직여야 한다.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 일제의 강점 하에 크나큰 고통을 당하고 해방과 동시에 다시 남북으로 나뉘는 슬픔을 떠안아야 했던 당시, 그가 쓴 글에서 역사가 후퇴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본다. 가슴이 먹먹하다. 지금 우리는 김구 선생, 그의 말씀을, 그의 정신을 곱씹어 보아야 할 때가 아닐까? 우리를 향한 그의 처절한 외침이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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